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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6-11 19:28
'성락원'의 원래 주인은 의친왕 아닌 '고종의 내시'였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5  

'성락원'의 원래 주인은 의친왕 아닌 '고종의 내시'였다

[주장] 성락원은 과연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가
19.06.11 17:18l최종 업데이트 19.06.11 17:18l
지난 5월 성락원의 역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가 발표됐다. 뉴스톱은 <'조선의 비밀정원' 성락원? 문화재적 가치 거의 없다>(2019/5/2, 석지훈)라는 제목으로 성락원의 역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여러 매체가 후속 보도를 냈다. 한겨레 <조선 때 별장 근거 없는 '성락원'에 27억 원 예산 지원한 정부>(2019/5/30, 이정규 기자)가 후속 보도를 냈고, 뉴스톱은 석지훈 박사의 기사를 반론하는 <'명승 문화재' 성락원은 경관적 가치가 충분하다>(2019/5/7, 팩트체커)를 내놓았다.

핵심은 '성락원'이라는 별장의 이름이 조선 후기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철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문화재청은 성락원에 대한 지원을 재검토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의친왕의 '성북동 별장'

기록상에 이조판서 심상응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성락원을 '철종 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몇몇 보도와 달리 오마이뉴스의 <'200년 된 비밀정원'이라는 성락원, 모두 거짓이었나>(2019/6/1, 신상미 기자)를 보면 성락원 일대가 의친왕의 별저였음이 확인된다.
 
< 그림1  > 이만오천분일지형도 : 조선 오른쪽은 지도의 일부분을 확대한 것인데 '이강공별저'라는 표기가 명확하다.
▲ < 그림1 > 이만오천분일지형도 : 조선 오른쪽은 지도의 일부분을 확대한 것인데 "이강공별저"라는 표기가 명확하다.
ⓒ 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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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도이다. < 그림1 >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만오천분일지형도:조선'(二万五千分一地形圖:朝鮮)으로 1915년(대정 4년) 최초로 측도되었으며 1937년(소화 12년)에 3차 수정 측도됐다. 지도를 보면 오른쪽 윗부분에 '이강공별저'(李堈公別邸)라는 표기가 되어 있다. 최초 측도 시점인 1915년에 의친왕의 별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937년에 의친왕의 별저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그림2  > 토지조사사업 직후의 5번지(좌)와 일부를 확대한 부분(우) 192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지적원도
▲ < 그림2 > 토지조사사업 직후의 5번지(좌)와 일부를 확대한 부분(우) 192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지적원도
ⓒ 국가기록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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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 성북동 5번지 폐쇄토지대장 5번지의 토지대장(좌)과 일부를 확대한 부분, 대정 4년, 이강공이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 < 그림3 > 성북동 5번지 폐쇄토지대장 5번지의 토지대장(좌)과 일부를 확대한 부분, 대정 4년, 이강공이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 성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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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대장에서도 현재의 성락원 지역이 의친왕의 소유였음이 확인된다. < 그림2 >를 보면 현재의 성락원 지역이 당시의 5번지와 산 12번지 일대에 해당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그림3 >을 토대로 5번지는 대정 1915년(대정 4년)부터 의친왕의 소유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 성락원의 나머지 부분에 해당하는 12번지 일대는 1917년부터 의친왕이 소유하게 된다. 이 시차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예정이지만 현재 성락원 일대가 의친왕의 소유였음은 명확해 보인다.

나아가 성락원 일대는 의친왕이 실제 사용하던 별장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은 저서 <마지막 황실의 추억>에 자기가 성북동 별장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의친왕비와 이곳에서 보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의친왕비 역시 해방 이후까지 이곳을 찾아 가벼운 등산을 즐기거나, 뒷산에서 쑥과 버섯을 따서 끓여 먹었다. 당시의 기록과 이해경의 증언 등에 따르면 성락원은 '이강공(의친왕) 별저' 혹은 '성북동 별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 망명 이후 이곳에 유폐되어 35년간 살았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상해 망명이 실패한 후 의친왕이 연금된 곳은 총독 관저 근처에 있는 녹천정이었다. 그 후에는 주로 현재의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사동궁에 머물렀다.

'성락원'의 원래 주인은 황윤명

그런데 의친왕보다 앞서 성락원 지역에 별장을 지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황윤명'이다. 황윤명에 대해서는 1916년 2월 22일 자 매일신보 <황춘파(수연)씨의 일생>에 잘 나와 있다. 기사에 따르면 1844년 출생인 그는 20세에 내관이 되었으며, 30세에 종1품인 명례궁 대차지(大次知)가 될 만큼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실제로 그의 이름 가운데 하나인 수연(壽延)은 고종이 내려준 이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50세에 조정이 문란하다고 여겨 동소문 밖 성북동에 머물렀다. 1893년의 일이다. 그의 취미가 고서와 고화, 고적을 모으는 것이며 추성각(秋聲閣)이라는 장서각에는 고금의 명필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성락원 지역의 별장 조성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그가 성북동에 머물렀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고집인 <춘파유고 (春坡遺稿)>의 내용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는 그가 성북동에 머물렀음을 증명하고 있다.
 
영벽지 해생(影碧池 海生※)
백천회불류(百川會不流) 여러 줄기 물을 모이게 하여 흐르지 못하게 하여
위소벽난두(爲沼碧欄頭) 푸른 난간머리의 (소)沼를 만들었네.
자오득차수(自吾得此水) 내 이 물을 얻은 후에는
소작강호유(少作江湖遊) 작게나마 강호를 만들어 노닐었다.
- 癸卯 五月 孫 文鶴 書 계유년 5월에 손자 문학이 쓰다

※ 해생(海生)은 황윤명의 (호)號인데, 그가 강원도 평해(平海) 태생이기 때문에 만든 호로 생각 된다.
 
바로 이 시가 현재 성락원 영벽지에 각자 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영벽지 주변을 조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성락원 초입에 위치한 '쌍류동천'(雙流洞天)이란 각자도 황윤명이 성락원 지역의 별장 조성을 증명한다.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을 '쌍괴누실(雙槐陋室)'이라고 표현했다. '쌍류를 베고 눕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쌍류동천 역시 황윤명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가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했다는 기록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성락원 중앙 연못에는 사각의 돌 가운데 원형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 곳이 있다. 이곳이 석가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춘파유고>에 현재 성락원 연못이 황윤명이 만든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문집의 내용과 현재 성락원 지역의 각자는 여러 곳에서 일치한다. 

남는 의문은 성락원 중앙 연못 바위에 새겨져 있는 '장빙가 완당'(檣氷家 阮堂), '청산일조'(靑山壹條) 등의 각자이다. 이곳에 김정희가 왔다면 황수연보다 훨씬 전의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장빙(檣氷)의 용례 및 서체 분석 등의 서예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황윤명과 대한제국 황실

황윤명과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도 주목된다. 황윤명이 고종의 총애를 받은 것은 앞서 언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성락원 지역의 소유주였던 이재완, 이후의 소유주인 의친왕과 모두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황윤명은 성북동에 머물면서 '삼산의숙'을 설립하고 학교 운영의 제반 경비를 담당했다. 이때 이재완은 황윤명에게 삼산의숙에 부채를 선물하고 의친왕은 그의 사후 삼산학교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는 모두 황윤명과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 그림4  > 성북동12-1번지 폐쇄토지대장 대정 6년 9월 27일 이강공(의친왕)의 소유가 되었음이 확인 된다.
▲ < 그림4 > 성북동12-1번지 폐쇄토지대장 대정 6년 9월 27일 이강공(의친왕)의 소유가 되었음이 확인 된다.
ⓒ 성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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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하였듯이 유독 영벽지가 있는 12번지 일대의 땅만은 5번지보다 2년 늦은 1917년(대정 6년) 9월 27일에 의친왕의 소유가 됐다. 이는 고종의 배려로 황윤명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이곳을 황실 소유의 땅으로 두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황윤명의 사망일은 1916년 2월 15일(양력)이다. 의친왕은 황윤명 사후에 그의 별장을 이어받아 본인의 것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종합공원시범관광지역 '성락원'의 탄생

이강공 별저 혹은 성북동 별장이 '성락원'이 된 것은 1961년 전후의 일로 보인다. 1961년 6월 2일 동아일보에는 <현대식 종합공원 시범 관광지역(綜合公園 示範 觀光地域)으로 한창 공사중 의친왕 별장(工事中 義親王 別莊) 자리에>라는 기사가 실린다. 기사의 일부를 이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북동 산 5번지의 깊숙한 골짜구니, 의친왕 고옥이었던 별장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범관광지역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중략) 개인의 땅인 이 3만 평의 산등성이 밖에는 7만여 평의 존치보안림이 병풍처럼 둘러져있어 총 부지는 10만여 평, 이 안이 '성락원'이란 이름의 종합적인 관광시설을 갖춘 현대식 공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의친왕 별장 자리에> 중에서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성락원'의 등장이다. 성락원은 의친왕의 별장 이름, 존재하지 않았던 '철종 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 이름이 아니라 1961년부터 조성하려 했던 '종합적 관광시설'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이곳이 의친왕의 고옥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성락원 지역이 의친왕의 별장 지역인 것은 앞서 누누이 확인했다.

성락원의 역사성,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성락원은 19세기 말, 고종의 내시를 지낸 황윤명(수연)의 별장이었다. 그는 고종의 배려로 왕실 소유의 땅인 이곳에 별서를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은퇴 시점과 문집 등을 살펴보면 별장의 조형은 대체로 1893년에서 1903년이다. 그의 사후 의친왕이 이곳을 이어받아 사용했다. 비록 35년 동안 이곳에 머문 것은 아니었지만, 의친왕과 그의 가족들의 별장 역할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락원'은 현대에 재탄생하였을지 모르겠으나 영벽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조선말에 조성돼 왕실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추가로 조사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현재의 성락원 가운데 어디까지가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정원의 모습인가 하는 점이다. 영벽지와 쌍류동천 부분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다 명확한 연구가 필요하다. 둘째, 이곳이 어떤 경위를 통해 '철종 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으로 둔갑 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성북문화원은 이 글에 그치지 않고 이 부분을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를 작성한 박수진, 백외준씨는 성북문화원에 재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