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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07 07:32
이완용을 위한 변명, 이승만학당의 억지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6  

이완용을 위한 변명, 이승만학당의 억지

[반일 종족주의 11] '을사늑약은 합법'이라는 환상에 집착한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19.10.07 07:15l최종 업데이트 19.10.07 07:15l
뉴라이트(신우익) 이론 그룹인 낙성대경제연구소 및 이승만학당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는 단순히 일제 식민지배만 미화하는 책이 아니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그 이전 단계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책이다.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관점에서 그들의 인식 세계가 드러난다.

을사늑약이 정상 절차를 거치지 않아 무효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군을 배치해놓는 위협적 분위기가 연출되고, 고종 황제의 전권위임장도 작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늑약 체결이 강제됐다. 또 조약에 대한 사후 승인인 비준 절차도 없었다.

늑약이 무효라는 점은 최고 통치자인 고종황제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늑약 2개월 뒤인 1906년 1월 29일 고종이 작성한 '조약 무효 문건'이 영국 <트리뷴>지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되고, 그해 12월 1일에 보도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 특사단도 그 같은 고종의 뜻을 세계 만방에 알리려 했다. 이런 사실들은 고종이 을사늑약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는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것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기승전 고종 탓

을사늑약은 국제법적으로도 당연히 엉터리였다. 국제법학자인 도시환 한국외대 로스쿨 외래교수가 쓴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문제점에 대한 재조명'이란 논문은 "을사늑약은 성립요건으로서의 조약체결 형식, 절차, 명칭을 구비하지 못한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대한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1899년 대한국제 제9조에 의하면 조약체결권자는 고종황제이므로 고종황제의 비준이 필요하고, 비준한 후 양국의 전권위임대표에 의해 비준서가 상호 교환되어야 양국간 조약으로서 성립하는데, 고종 황제는 이에 비준하지 않았다. 즉 한국 황제의 비준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구비하지 못했던 을사늑약은 성립조차 되지 않은 조약, 환언하면 조약으로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 대한국제법학회가 2015년 발행한 <국제법학회논총> 제60권 제4호.
 
조약의 성립요건마저 충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황제인 고종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정당하고 합법적이지 않음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반일 종족주의>는 이의를 제기한다. 체결 과정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승만학당 교사인 김용삼 전 <조선일보> 기자가 담당한 <반일 종족주의> 제17장 '을사오적을 위한 변명' 편은 "이토가 직접 붓을 들어 문안 수정 작업을 했고, 이 내용을 정서한 다음 고종의 재가를 받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공식적으로 조약이 체결"됐다고 말한다. 일본군이 위협하고 전권위임도 없었고 비준도 없었다는 점 등의 절차적 하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본 정부에 의해 조약이 유효로 간주된 사실만을 근거로 "공식적으로 체결된 조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반일 종족주의>는 고종이 늑약을 승인한 것 같은 인상마저 주려고 시도한다. 일본군과 이토 히로부미에 둘러싸여 속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고종이 이토에게 한 인사치레 한마디를 찾아내, 고종이 조약을 비준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이토 특사에게 '새 협약의 성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 짐은 신병으로 피로하지만 당신은 밤늦도록 수고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소'라는 위로의 칙어를 내렸습니다."
 
'위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위로의 칙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말이 늑약에 대한 정식 승인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고종의 말이 조약에 대한 비준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그것을 근거로 을사늑약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김용삼 기자가 제시한 증거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입증하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그를 비롯한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고종이 을사늑약을 승인했음을 입증하고자 최대한 열심히 자료를 찾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게 고작 '위협적 분위기에서 고종이 던진 위로 한마디'뿐이라는 것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도 늑약의 유효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미려 하다 보니 억지 주장을 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을사늑약은 합법'이라는 환상에 과도하게 집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완용이 했던 결정적인 말
 
 을사늑약이 강제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이 강제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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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에 대한 그들의 변호는 을사오적에 대한 변호로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을사오적의 대표주자 이완용에 대한 <반일 종족주의>의 서술은 이렇다.
 
"이완용은 매국행위로 이름을 더럽힌 인간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멸망의 모든 책임을, 특히 을사조약의 책임을 이완용과 을사오적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당시 황제였던 고종의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을사늑약 체결이 고종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고종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김용삼 전 기자의 말은 분명히 옳다. 체결을 지시했건 안 했건 고종이 나라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그 지경까지 이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을사오적의 책임을 감면할 수는 없다. 이토의 요구를 거부하는 고종이 늑약 체결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을사오적이었다. 그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이완용이었다.
   
 이완용.
 이완용.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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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5일부터 외교권 포기를 요구하면서 고종을 압박했다. 하지만 고종은 외면했다. 각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태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게 바로 이완용이다.

1905년 12월 16일자 <고종실록>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이완용이 분위기를 전환시킨 시점은 11월 16일이다. 이날 고종은 각료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누구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했다. 고종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일단 미뤄보자"며 시간을 끌려고 했다. 이때 이완용의 한마디가 고종의 태도를 바꾸는 촉매제가 됐다. 이완용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뵙겠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폐하의 마음이 단호해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신다면 나라를 위해 진실로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만약 넓은 도량으로 부득이하게 허락하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 미리 대책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황제 당신이 끝까지 외교권을 지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지만, 부득이하게 포기하게 될 경우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끝까지 거부할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속뜻은 '당신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마음이 흔들렸다. 조약 체결 문제를 대신들에게 위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동의의 표시로 간주했다. 그는 각료들을 모아 놓고 위협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황제가 당신들에게 위임한 것은 찬성한 것이니 마찬가지"라며 "빨리 결론을 내라"고 윽박질렀다. 그렇게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대신이 찬성을 표방하면서 을사늑약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이완용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이토도 하지 못한 고종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역할을 그가 해냈다.

그런데도 <반일 종족주의>는 "이완용은 며칠 전 입각한 신참 학부대신에 불과했습니다"라며 이완용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에 대한 비판은 <대한매일신보> 같은 당시 언론들의 오보에서 나왔다며, 이완용에 대한 비판을 거둘 것을 호소한다.

고종의 책임 있다고 해서 을사오적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서술한 <고종실록>이 제작된 경위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실록은 군주가 죽은 뒤에 편찬된다. <고종실록>도 고종이 죽은 뒤인 1935년 완성됐다. 일본제국주의의 위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편찬됐던 것이다. 편찬한 기관은 일본 왕실(황실)의 감독을 받는 이왕직(조선왕실 사무처)이었다.

위에서 사료를 소개한 것처럼, 이왕직이 편찬한 <고종실록>은 을사늑약에 대한 이완용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런 사실을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근거도 없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도 감안하지 않고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을사늑약 당시의 한국인들이 사실확인도 없이 을사오적만 비판하고 고종은 면책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의 책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있었다. 당시 최고의 논객인 최익현은 고종에게 제출한 상소문에서 "폐하께서 끝까지 반대하셨다면 저들이 군대를 배치하고 억지로 협박한다 해도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며 고종을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을사오적을 더 비판한 것은 이들이 고종을 부추겨 늑약 체결을 주도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왕조국가의 특성도 작용했다. 웬만한 사안이 아니면 군주를 비판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고종에 대한 비판이 더는 크게 부각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고종의 책임을 몰라서 을사오적을 중점적으로 비판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 고종이 최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서 을사오적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베 신조 총리를 지지하고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제2의 을사오적'이 출현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런 사정도 감안하지 않고 <반일 종족주의>는 "11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한국인이 망국의 책임을 을사오적에 묻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신문화의 지체를 의미합니다"라고 말한다. 을사오적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는 지체된 정신문화, 즉 후진적인 정신문화라는 것이다.

<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정신문화의 지체'까지 거론하면서 을사오적을 감싸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을사오적이 매국노로 규정되면, 그들과 함께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도 불의한 세력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근저에서부터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옳았다'고 주장하려면 '그 전 단계에서부터 일본이 잘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와 이승만학당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위한 변호인단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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