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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1-02 05:12
'빨갱이' 구하려고 탄원서 돌린 우익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8  

'빨갱이' 구하려고 탄원서 돌린 우익들...

이런 일도 있었다한국전쟁 때 신탄진에서 벌어진 '선행의 선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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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01 08:04 수정 2019.11.01 08:04
 

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기록 사진. ⓒ 미국립문서보관소

 
이종구(가명) 신탄진 대한청년단장은 관내 가가호호를 방문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제 스무 집 받았네' 여러 사람이 나눠서 진정서를 받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대한청년단장이라는 감투가 무색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많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점심도 거르고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문식이 있는가?"
"단장님 오셨슈. 어쩐 일이래유?"
"진정서에 도장받으러 왔네."
"아! 명섭씨 일인가유? 징역 15년을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유?"


'그렇다'는 이종구 단장의 말에 조문식(가명)은 선뜻 도장을 찍어 주었다. "단장님 고생 많구만유." "고생은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 그럼 쉬게." 조문식의 집에서 나온 이종구 단장은 오후 내내 마을을 다니며 같은 방식으로 도장을 받았다. 하루 종일 받은 도장이 63개였다.

4월 초라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서늘했지만, 종일 발품을 파느라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저녁에 대한청년단 사무실에서 모이기로 했기에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자욱한 담배연기로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아이고, 너구리 잡는가? 담배 좀 작작들 피게." "제가 아까부터 얘기했는디 콧방귀만 뀌네요." 청년단 부녀부장을 맡고 있는 최점례(가명)가 입을 삐죽거리며 이야기한다.

"자, 모두들 조용하고, 도장 몇 개나 받았는지 점검해 보고 밥이나 먹으러 가세."

20여 명이 마을 별로 나뉘어 도장을 받다보니 그날 하루에만 천 명의 도장을 받았다. "모두들 고생했네. 모레까지 받으면 우리가 목표한 5천명을 달성할 것 같네. 모레까지만 고생하세. 자, 밥 먹으러 가자구." 단장의 말에 모두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도장을 받길래, 20명이나 동원되어 5일씩이나 동분서주하는가?

식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이들은 충남 대덕군 북면(현재의 신탄진)의 내로라하는 유지들이었다. 대한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 애국부인회 간부들과 신탄진지서 차석 부인 등이었다. 그렇다면 신탄진의 유지들이 생계도 내팽개치고 동분서주하며 받는 진정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전 인민위원장 정명섭이었다. 그는 북한군이 점령하던 인공시절 북면(신탄진)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부역죄가 적용되어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이념이 갈라치지 못한 사람들

정명섭은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충남지역을 통치하면서 충남 대덕군 북면 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다. 현재로 따지자면 면장이다. 인공 시절 인민위원장 감투는 막강한 것이었다. 모든 행정업무를 인민위원장 책임하에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군의 지휘를 받던 치안대가 관내 우익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소위 '반동인사' 검거였다. 검거대상 1호는 군·경 가족과 우익청년단 간부였다. 반동인사 검거는 신탄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되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예외는 없었다.
 
각 읍·면별로 군·경 가족과 우익단체 간부들이 연행되어 지서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즉시 관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충남의 경우 각 경찰서에 연행된 이들이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950년 9월 25일~26일 형무소 안의 우물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약 15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신탄진지서(북면지서)에 구금된 이들이 위와 같은 코스를 밟는 건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구세주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소장님, 이 양반들은 아무런 죄가 없시유. 누구를 해꼬지한 적도 없고,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적도 없구만유.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겄시유."

이렇게 사정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인민위원장 정명섭이었다. 인민위원장이 사정을 하자 분주소장(현재의 파출소장)은 난처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사정하니 석방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인민위원장 정명섭이 누구인가? 혁명가의 유가족 아닌가.

선순환의 시작
 
북한군이 신탄진을 점령한 1950년 7월 말, 인민군은 행정조직을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면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을 선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인민위원장 자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혁명가의 유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신탄진에 와서 지역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충남 대덕군 북면 평촌리 출신의 정천섭이 한국전쟁 직후 대전 산내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천섭은 정명섭의 둘째 동생이었다. 

정천섭은 서울대학교생으로 해방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대한민국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재소자들과 예비검속한 보도연맹원들을 산내에서 집단 처형했다. 이 와중에 정천섭도 불귀의 객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은 좌익활동가들이 전향해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 관제반공단체 회원들이었다. 하지만 정천섭을 비롯한 형무소 사상범들은 알짜배기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북한군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원들은 배신주의자, 기회주의자들이고, 정천섭은 혁명가였다.

그러니 정천섭의 유가족은 인공 시절 북한군에게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정천섭의 형 정명섭이 인민위원장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 정명섭이 우익인사들을 풀어주자고 강력히 요청하니, 분주소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우익인사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분주소장은 할 수 없이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군·경 가족과 우익단체 간부 십여 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정천섭 ⓒ 박만순

 
"이놈아, 데모할 시간 있으면 농사일이나 거들어!"

정명섭(1920년생)이 동생 정천섭(1924년생)을 나무랐다. 그러찮아도 수확 철이라 정신없는데, 1년 만에 집에 들른 정천섭이 용돈을 달라며 손을 벌리기에 한 말이었다. 정명섭이 "집 안에 할 일이 태산인데 맨날 데모질이나 하고 다니냐. 순사가 매일 와서 니 엄니랑 나를 못 살게 군다"고 핀잔했다. 하지만 정천섭은 "세상이 바뀌어야 농민들도 주인 노릇하면서 잘 살 수 있어요"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던 명섭에게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둘이 한참을 티격태격했고 천섭은 서울로 올라갔다. 명섭은 담뱃대를 물고 한숨을 쉬었다. '엄니랑 가족들이 삭신이 쑤시도록 일 해서 서울대학교에 보내니, 맨날 데모질이나 하구 다니니. 쯧쯧...' 1947년 가을 충남 대덕군 북면 평촌리 초가집 마루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이었다.

그런 둘째가 감옥에 갔다. 1948년이었다. '빨갱이 물이 들어 매일 데모한다'더니,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천섭은 징역 3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 철창에 갇혔다. 작은 형과 14살 차이의 셋째 준섭(1938년생,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은 어머니 강수진과 함께 형무소에 면회를 갔다.

"엄니, 몸 보존 잘하세요. 준섭아, 엄니 잘 모시고 공부 열심히 해라"는 작은 형의 당부를 받은 준섭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와 함께 세 차례 면회를 한 준섭은 "형은 의연한 모습이었어요"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러다가 만기 출소 1년을 앞두고 6.25가 터졌다. 천섭 역시 다른 이들처럼 산내에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 강수진은 대성통곡을 했다. 69년이 지난 지금도 준섭의 귀에는 어머니의 피울음소리가 쟁쟁하다.
 
선행의 선순환
 
둘째 형이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고, 큰 형이 부역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막내 준섭의 삶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둘째 형이 안타깝게 학살되었지만 큰 형 명섭은 지역 유지(우익인사) 들의 도움으로 석방됐기 때문이다. 

명섭이 인공시절 분주소에 구금되어 있던 우익인사 구명운동에 나선 일로, 거꾸로 우익인사들에 의해 석방될 수 있었다. 대전지방법원에서 15년형을 받았지만 우익인사들이 주도한 주민들의 '진정서' 덕을 봤다. 징역형을 선고받기까지 잠시 옥살이를 했지만 진정서로 인해 실형을 면한 특이한 사례였다.

사지로 끌려갈 보도연맹원들을 살려 준 지서장이나 지역 유지의 사례는 전국에서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런데 '인민위원장' 구명을 위해 '우익인사'들이 주도해 주민들 진정서를 받았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 없다. 아마도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전쟁의 광기에서 보복의 악순환이 아닌 선행의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 신탄진에서 일어났다.
 

우익인사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된 정명섭 ⓒ 박만순

 
1951년 석방된 정명섭은 그 후 수명을 다할 때까지(2012년 93세로 작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평탄하게 살았다.

막내 준섭도 둘째 형을 잃은 슬픔을 딛고 순탄한 삶을 살았다. 신탄진 초등학교, 대전사범 병설중학교를 거쳐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천안과 신탄진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신탄진 초등학교에서 퇴직했다. 그가 교사를 하면서 연좌제나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정준섭은 교사를 그만둔 후 무역회사와 자수학원, 홈패션학원을 경영했지만, 산업구조재편으로 수출 길이 막혀 1997년경에 사업을 정리했다. 그 후 대전에서 유선방송 일에 관여하다가 방송에서 귀가 번쩍이는 뉴스를 들었다. '대전 산내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유가족이 모임을 가진다'는 소식이었다. 2000년도에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주선으로 유족들이 반 백년 만에 자리를 함께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사연이 토로될 때마다 울음이 터졌다.

정천섭도 그때 산내 학살현장을 처음으로 갔다. 야산에 뒹구는 두개골과 유해는 끔찍했다. 아버지와 형, 가족들이 학살되어 그렇게 방치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얼얼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족회 결성을 결의했고, 정준섭은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매달 15일은 대전유족회 정기모임일이 되었다. 정준섭은 2년 동안 회장을 맡다가 개인적인 사유로 직을 넘겼다. 

2005년에는 당시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 형 정천섭 사건의 진실규명 신청했고, 진실규명 확인결정을 받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증언자 정준섭 ⓒ 박만순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되면서 한반도가 겪은 좌우 이념대립은 급기야 동족 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국가폭력이 난무하고 좌우가 서로에게 '반동'과 '빨갱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상처를 입혔다. 그 전쟁은 지금까지 진행중이다. 

그러나 충남 대덕군 북면(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의 정명섭과 이웃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이념과 사상으로 사람들을 갈라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눈물 나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역사에서 이 이야기만큼은 따듯한 미소를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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