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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03 17:26
전창혁 상가에서 동학혁명 점화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5  

전창혁 상가에서 동학혁명 점화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23회] 민심과 여론에 등을 돌린 지 오래인 탐관오리들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20.01.03 16:30l최종 업데이트 20.01.03 16:30l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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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에 끌려간 전창혁은 수없이 곤장을 맞고 집으로 돌아와 한달 만에 눈을 감았다. 장독으로 숨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매 맞고 죽은 전봉준의 아버지 상가를 찾았고, 남다른 우의를 나누어 온 김개남도 빠지지 않았다.

전봉준과 김개남 등 동학접주들은 전창혁의 장살을 계기로 관아에 청을 내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민심과 여론에 등을 돌린 지 오래인 탐관오리들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만석보 문제에 대한 고부 농민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전창혁(전봉준의 아버지) 등이 감옥에서 장살되자 김개남은 손화중, 최경선 등을 찾아가 계책을 논하였으나 손화중은 처음 동학교리를 내세워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전봉준에게 제의하였다.

전봉준은 자신을 위안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였으나 김개남이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재차 전봉준을 찾아가 4자 회동을 갖고 봉기를 결의하였다. 김개남은 전주ㆍ태인ㆍ고부ㆍ고창ㆍ무장ㆍ정읍ㆍ부안 등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여론을 규찰하였다. (주석 11)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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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과 전봉준은 앞에서 소개한대로 어릴적 이웃마을에서 함께 살았고, 김개남의 중매로 전봉준의 큰 딸 전옥례는 지금실 마을의 강민복과 결혼해서 김개남과 같은 마을에서 살아서 두 사람은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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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비슷한 시기에 동학에 입도하여 각각 포의 책임을 맡았기에 믿는 마음과 시국을 보는 눈이 유사했을 것이다. 전봉준의 아버지가 서당을 열어 훈장 노릇을 하여, 집안 누대로 사족(士族)이었던 김개남도 전창혁의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의협심이 남달랐던 김개남은 전봉준 아버지의 참변에 분개하면서 같은 동학의 손화중ㆍ최경선과 더불어 전봉준을 위로하는 한편, 이참에 고부군수를 처단하고 봉기할 것을 제안하였다. 손화중은 고창의 동학 책임자이고 최경선은 태인 출신으로 김개남과 뜻을 같이하는 도인이었다.

역사의 큰 사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동학농민혁명의 거대한 물줄기에는 전창혁의 장살이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민란의 수준을 넘어서는 농민봉기의 제 조건이 무르익어가고 있었지만, 적어도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게 된 것은 '전창혁 상가'에서 점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왕조시대에 민란은 반역행위에 속했다. 주모자가 붙잡히면 능지처사되고 집안이 풍비박산당하는 중죄에 속했다. 조선후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의 주동자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죽어갔다. 해서 어지간히 담이 큰 인물이 아니고는 여간해서 봉기를 주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종 집권기에 왕권이 다소 약화되기는 했지만, '반역'에 대한 징치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최제우는 처형하고 이필제와 그 연루자들은 가차없이 죽였다. 전봉준의 아버지가 만석보의 수세를 경감해 달라고 관청에 호소했는데도 때려 죽인 것은, 유독 조병갑이 악독해서만이 아니고 당시 세도가들의 일반적인 행태였다. 따라서 봉기는 목숨을 내건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전창혁 상가에서 거사를 제기한 김개남은 도강 김씨 문중의 청년들을 동학에 입도시키고 그중에 24명이 접주의 임첩을 받았다. 한 문중에서 이같이 많은 접주가 나온 것은 도강 김씨가 유일했다.

이들은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의 깃발을 내걸고 '보은집회'가 열렸을 때 김개남의 주선으로 다수가 참여하고, 김개남은 이때에 최시형으로부터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을 받았고, 동시에 대접주의 임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손병희ㆍ손화중 등 19명도 함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김개남은 이보다 앞서 태인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하지가 않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 임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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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에 전라도 광양에 기거했던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는 매우 날카롭게 대원군과 고종을 비롯 정부 신료들을 비판하면서도 동학에 대해서는 지극히 적대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당시 일반 유학자들과 다르지 않는 시각이었다. 『오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적(동학농민혁명군)이 지난날 고부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 그 우두머리들은 태인 사람이 많았다. 이런 까닭에 전라 좌, 우도에서 태인접은 접주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대를 받았으며, 다른 지역의 접주들은 모두 태인이라는 호칭을 부러워하였다. (…)

전봉준과 김기범(김개남)의 나이는 모두 마흔 살쯤 되었다. 기범의 집안은 태인 지방에서 몇 대에 걸친 토호였던 까닭에 그 지방 사람들은 이들 집안을 '도강 김씨'라고 불렀다. 시풍 또한 이들과 한 집안 사람들이다. 기범의 사람됨은 음험하면서도 의지가 굳은 면이 있어 자못 무력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난이 일어났던 초기에 그 집안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난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강 김씨 중에 접주가 스물 네 명이나 되었다. 

기범은 스스로 꿈에 신령이 나타나 손바닥에 '개남(開南)' 두 자를 써 주었다고 말하면서 '개남'을 호로 삼았다. 이렇게 되어 태인은 적의 소굴이 되어 재물이 산처럼 쌓이고 집집마다 4~5 마리의 말을 길렀으며 (…) 집집이 총을 쌓아 두었는데 적은 경우라도 10여 자루가 되었다.

여기서 보이듯이 김개남의 도강 김씨 문중과 태인 향리에서 동학 도인들이 많았고, 김개남은 그런 힘을 바탕으로 동학혁명의 시발인 고부관아의 점거를 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업무를 분담하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해 한겨울(12월 10일) 무장의 동음치 당상리(현재 고창군 공읍면) 송문수의 집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벌였다. 이 자리에는 전봉준을 비롯해 손화중ㆍ김성철ㆍ정백현ㆍ송문수ㆍ김홍섭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전라감사 김문현의 폭정에 항거하기로 결의했다. 정백현은 무장의 선비 출신으로 뒤에 전봉준의 비서로 일했고 고창 사람인 김흥섭은 전봉준의 수행원으로 활동했다.

다음 해 2월 19일에는 동읍의 신촌리 김옹의 집에 모여 모든 준비를 구체적으로 세웠다. 이 자리에는 위의 사람들 말고도 김개남ㆍ인천서ㆍ김덕명ㆍ강경중 등 호남의 지도자들과 사발통문 서명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작업을 연달아 모의했다. (주석 12)


주석
11> 김호성, 앞의 책, 254쪽.
12> 이이화, 앞의 책, 9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