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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06 06:17
안핵사 이용태의 탐학, 농민봉기 부채질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3  

안핵사 이용태의 탐학, 농민봉기 부채질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25회] 오로지 재물갈취와 정치보복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던 안핵사 이용태
20.01.05 15:04l최종 업데이트 20.01.05 15:04l
 
 학교 앞 언덕에 있는 고부관아 배치도.
 학교 앞 언덕에 있는 고부관아 배치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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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는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현지에 보냈다. 안핵사는 조선후기에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 벼슬아치였다.

그런데 이것이 또 화근이 되었다. 농민들은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이용태는 역졸 800명을 대동하고 고부에 내려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마을마다 수색하면서 닥치는대로 농민들을 체포하고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젊은 여자들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군수 박명원에게도 협박ㆍ공갈의 행패를 부렸지만 신임군수는 안핵의 일을 맡은 이용태와 맞설 수 없는 처지였다.

군중들이 해산하고 10일도 못되어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00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이닥쳐 새로 부임한 군수 박명원에게 민란의 주모자들을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역졸을 고부군내에 풀어 마을을 뒤지고 다녔다. 부녀자를 간음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백성들을 마구 구타하고 고기꿰듯 사람을 얽어갔다. (주석 14)
 
 동상 아래에 새겨 넣은 부조.
 동상 아래에 새겨 넣은 부조.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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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사 김문현도 사태수습보다는 재물 긁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부자들을 잡아다가 동학교도라는 구실로 매질을 하고 재물을 울궈냈다. 무관한 사람들까지 끌려와 곤장을 맞거나 재물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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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포교, 감영에서 온 포교, 각 읍에서 차출되어 온 사령배들까지 동학도의 체포에 혈안이 되면서 고부는 '늙은 황소를 뜯어먹는 야수들의 쟁탈전'과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용태는 고부ㆍ부안ㆍ고창ㆍ무장 등 각지로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함이 많았다. 하루는 무장 선운사에서 다소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잡아 동학군이라 트집을 잡아 결박하여 서울로 압송하다가 손화중 포(包) 도인들의 손에 걸려 정읍 연지원 주막거리에서 매를 얻어 맞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경포(京捕 : 서울에서 온 포교), 영포(營捕 : 감영에서 온 포교) 각 읍 사령배들이 벌때같이 쏟아져 일어나 동학군 잡는 일이 더 한층 그악스러워졌고 동학군들도 역시 전과 달라 목숨을 걸고 반격할 자세를 취했다.…이때부터 인심은 극히 흉흉해지고 앞으로 장차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석 15)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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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을 진압할 안핵사의 임무를 띄고 내려온 이용태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조정에 보고 한번도 올리지 않았다. 오로지 재물갈취와 정치보복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용태와 김문현, 대소 포교들이 할퀴고 간 자리는 초토화, 그것이었다.

난민들의 가옥이나 재물 뿐만 아니었다. 김개남ㆍ전봉준ㆍ김도삼ㆍ정익서 등의 집이 불타고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체포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의 만행이 혁명의 불길에 석유를 끼얹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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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를 공격할 때까지만 해도 일반 농민들은 아직 혁명의 기운이 충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1차 봉기 때는 고부군 지역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용태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뒤늦게 조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장계(狀啓)를 올렸다.

1. 토지제도가 해이해진 점
2. 전운소(轉運所)가 부족미를 채우기 위하여 수탈한 점.
3. 유망(流亡)한 곳의 세를 받을 수 없었던 점.
4. 개간한 황무지에 과세한 점.
5. 미개간한 황무지에 땔감을 과세한 점.
6. 만석보에 과세한 점.
7. 팔왕보(八旺洑)에 과세한 점. (주석 16)


그 나름대로 민요의 원인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리석은 백성으로 끊임없이 지배세력의 수탈을 당하고도 힘이 없는 것을 한탄하거나 자신의 박복으로 돌리고 체념했던 호남의 항민(恒民)이, 지배층의 수탈에 원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순응적이었던 호남의 원민(怨民)이, 이제 정의감에 불타 개혁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호민(豪民)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도층의 행동은 처음부터 민란이나 민요(民擾)의 수준이 아니었다. 바로 혁명의 서막이었다. 그 선두에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섰다. 이 날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인들이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며, 역사에는 고딕체로 기록되고, 읽는 이들은 밑줄을 처가면서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1864년 3월 '혹세무민'과 '좌도난적'의 죄명으로 처형되고 나서 3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교조신원'과 같은 전면적인 동학행사로 보기는 어렵다. 고부군수의 야수적인 탐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러면 왜 하필 고부 지역에서 혁명의 봉화가 타올랐을까.

고부군은 옛부터 땅이 기름지고 관개시설이 잘 돼 있어서 부촌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탐관오리들이 고부의 수령으로 가는 것을 열망하였다. 중앙권력의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만 고부군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군수가 자주 교체되고 임기를 채우고 떠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원자가 많아서 1년에 군수가 몇 차례 바뀌기도 하였다.

역대 수령들의 재임기간을 계산한다면 1573년 (선조6)부터 1755년 (영조31)까지 약 180년 동안에 133명의 군수들이 교체되어 재임기간이 1년 반 정도이고, 그 가운데서도 1628년 (인조6)에서 1644년 (인조22)까지 17년 동안에 17명의 수령이 교체되어 평균 1년도 채 못 된다. 이러한 이유를 읍 유생들은 풍수지리에 의한 부임역로(赴任歷路)에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 17)


주석
14> 최영년, 「동도문변(東徒問辨)」,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32쪽, 재인용.
15> 최영년, 앞의 책, 최현식, 앞의 책, 49쪽, 재인용.
16> 『고종실록』 갑오 (1894) 4월 24일자.
17> 최기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운동연구』, 175쪽, 서경문화사, 200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